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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풍구타령-신작악보와 신작평(계간 낭만음악 2003년 겨울호)

bero1966 2013. 9. 27. 14:40

아주 우연히 10년 전에 작성된 나에 관한 글을 다시 보게 되었다.

작곡가 신동일선생이 음악잡지 [낭만음악]에 올린 글이다.

오래된 일이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나의 작업을 의미있게 평가해준 점에 대해 다시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몇 가지에 대해서 부연하고 싶다.

내가 오랜 꿈이었던 음악도가 된 것은 1998년, 부산예술대학 음악과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이 학교는 내가 졸업할 무렵 '부산문화예술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나중에 다시 '부산예술대학'이 되었다.)

당시 형편으로는 작곡레슨을 받기 어려웠고, 지인 중에 피아노 전공자가 있어서 우선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한 학기를 마친 다음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 때 발표수업을 위해 혼자 처음으로 반주까지 붙인 처녀작이 가곡 <송인>이다.

이 곡을 쓰며 나는 아라리의 장단에 북과 피아노 반주를 곁들였고, 북반주도 내가 하였다.

말하자면 민요풍의 가곡을 쓴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몇 차례 그러한 국악풍의 곡을 썼고, 국악가요도 썼으며,

워크샾 시간에는 <수제천>으로 발표를 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우리음악의 요소를 담으려는 시도를 계속한 것이다.

내가 우리음악에 이처럼 관심을 가지며,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일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음악적 재능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이다.

어머니 당신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시고 자라신 까닭에 우리음악, 우리문화와 예술에 대해 배우거나 접할 기회가 적었고,

오히려 다른 나라의, 특히 서양과 일본의 관점에 입각한 교육환경에서 자라셨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대종교를 신봉할 만큼 민족의식이 뚜렷한 분이셨고, 어머니 또한 그 영향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은 내게도 대물림 되었던 것 같다.

천도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동학의 역사적 의미와 철학적 내용에 공감했고, 개인적으로는 마음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어린 시절에 형성된 그러한 민족의식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으로 스스로는 생각한다.

그리고 창작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우리음악을 공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름대로 우리음악의 요소를 가미하여 작곡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서양음악이지 우리음악은 아니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 고유의 음악어법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각성이 끝내는 우리음악 탐구로 이어졌던 것이다.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에 작곡전공으로 편입한 것은 부산예술대학을 졸업하고 1년 후인 2001년이며, 북한민요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2002년에 작곡한 <풍구타령>이다.

당시 우리음악에 대해 공부하던 초기단계였기 때문에, 나는 <풍구타령>의 주제가 된 황해도 풍구소리에 대해 공부하고자 북한민요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북한 토속민요를 주제로 한 논문은 단 두 편의 석사논문뿐이었고, 이 논문들은 창작에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북한민요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도 적다는 점에 놀라면서, 나는 우리민요의 절반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북한과 제주도의 민요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기에, 대학원에서 북한민요를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2002년 초의 일이었고, 그 해 여름 민요특강에서 최상일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 특강의 뒷풀이에서 북한민요 연구계획을 말씀드렸을 때, 북한 현지에서 채록된 다량의 민요를 MBC에서 입수했다는 사실을 그분이 말씀해주셨고, 운 좋게도 나는 곧바로 현지음원을 토대로 북한민요 연구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신동일선생의 이 글이 씌어진 2003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전문사과정에 진학하여

2007년 "평안도민요의 음조직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고, 

2012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2015.2월)  남북한민요 전반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며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지난날의 글을 보며, 신동일, 최상일, 두 분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 신작악보와 신작평
계간 낭만음악 제16권 제1호(통권61호) 2003년 겨울호  


김정희의 <풍구타령>


신 동 일


작곡가 김정희를 이야기할 때 그가 살아온 삶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초등학생 딸을 가진 30대 후반의 주부가 무엇 때문에 늦은 나이에 작곡 공부를 하고 민요를 연구하면서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는 왜 지금 선택한 그의 길을 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인가?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삶을 한 번 살펴보자. 부산 출신인 김정희는 어린시절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을 가졌던 것 같다.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는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을 물으면 “어머니, 그리고 작곡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두 가지 꿈 중 하나(어머니)는 이미 이루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이 음악대학 진학을 현실화시켜 주지 못했고, 그는 결국 공과대학으로 진학하게 된다. 대학 재학 중 6월항쟁을 거치면서 그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닫고 학생 운동을 하다가 아예 학교를 중퇴한 뒤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학교를 그만 두면서 “현장 생활을 통해 단련된 후에는 음악으로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공장 생활 중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이상 공장에 다닐 수 없게 되자,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던 경험을 살려 피아노 강사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무자격 강사라는 것이 적발되어 재취업도 되지 않자, 자격증 취득을 위해 처음으로 2년제 음악대학에 입학한다.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한 그는 작곡 전공으로 졸업했는데, 음악 공부를 하는 도중 천도교를 알게 되어 우리 전통 사상과 문화 예술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그는 천도교를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음악의 길을 정립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항상 서양의 것을 먼저 배우게 하는 교육체계 속에 성장해 온 결과, 참으로 가치 있는 우리 것은 언제나 뒤늦게 알게 되는 모순을 또 한 번 심각하게 느꼈고, 음악에 있어서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듣고 불렀던 모든 노래들이 ‘남의 것’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노래는 듣지도 부르지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 이제 나의 노래는 ‘우리민족의 노래’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자격증부터 따고 보자던 나의 음악 공부는 새로운 각오로써 다시 시작되었다. "  

김정희는 부산문화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몇 년 간의 노력을 통해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에 편입한다. 이 때부터 김정희의 음악 작업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게 된다. 전통 음악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깊이를 더하고 작품의 성격이나 완성도도 이전의 작품들과 크게 변화했다. 생업을 위한 아르바이트와 가사 일을 병행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한국음악과에서 전통음악을 충분히 훈련받은 후,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로 진학한다. 그의 대학원 진학 역시 막연하게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항상 노래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정희는 민요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길을 찾던 중 “한국민요대전”을 제작한 최상일 프로듀서를 만나면서 방향을 잡았고, 현재 최상일 프로듀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북한 민요 연구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한 것이다. 현재 그의 목표는 북한 민요 연구를 통해 전통 음악 어법 문제를 정리하고 이것을 작곡에 적용할 수 있는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김정희는 아직 많은 작품을 써 내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작곡을 할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매 작품마다 분명하게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해 나가고 있으며, 작품 자체도 이미 습작 수준을 넘어 음악적으로 밀도가 있다. 그는 이제 국악창작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개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통 음악의 음악적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작곡이라는 창작 행위를 통해 다양한 텍스추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정희는 자신의 생각과 삶과 하고자 하는 예술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의 결과이며, 그의 예술은 그의 생각과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가꾸어 나가고 있다. 

 

 
김정희의 <풍구타령>

  
김정희의 국악실내악을 위한 “풍구타령”은 국립국악원 주최 2003년 전국국악경연대회 작곡부문 금상 없는 은상 수상작이다. 악기 편성은 풍류대금, 피리, 산조 가야금, 소아쟁, 장구이고, 토속민요인 황해도 풍구소리를 테마로 하고 있다. 이 곡은 그의 민요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으며, 전통음악과 국악기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악기 사이의 앙상블을 꼼꼼하게 구성해 나가고 있다.
곡은 크게 중중모리와 자진모리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전통음악적인 흐름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으며, 일면 시나위 합주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악기가 번갈아 가면서 연주하는 독주 부분과 악기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대화하는 대위법적인 부분, 가장 강하게 연주되는 합주 부분이 교대되어 등장하는데, 전 곡은 하나의 가락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곡가는 피리에 중심 가락을 주고 작곡했다고 하는데, 모든 부분이 한 가지 가락을 서로 다르게 연주하는 전통음악의 어법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부분적으로 어떤 악기가 반주 역할을 한다든지, 대위법적인 텍스추어를 만든다든지, 다양하게 전조를 시도한다든지 하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화성의 사용은 대단히 억제되어 있고 간간이 4도나 5도 구성의 단순한 화음이 나타나거나 서로 다른 가락이 연주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복합적인 울림이 사용되는 정도이다. 하나의 가락을 여러 악기들이 연주할 때 악기별로 가락이 다른 리듬을 갖고 변형되기도 하는데, 이 때 변형되는 가락들은 매우 섬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가장 강한 합주 부분들은 주로 유니즌으로 연주되는데, 음향이 빈약해 지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곡의 시작은 “풍구소리” 민요 가락의 단편이 작곡가 나름대로 변형되어 테마로 제시되면서 점차 복잡하게 발전한다. 잦은 전조는 전통음악 어법을 충실히 따라 “작곡”하는데서 발생하는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조적 중심이 있고 전조를 통해 조적 중심이 자주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고 조성이 급격하게 바뀌어 전혀 엉뚱한 조성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없고, 모든 전조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중모리와 자진모리 모두 처음과 끝이 같은 조로 되어 있어 조성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고, 처음 제시된 풍구소리의 단편으로 만들어진 테마는 전 곡을 지배하고 있다. 자진모리에서는 리듬적인 특징이 더욱 부각되면서 흥을 더하고, 악기들의 독주 부분도 더욱 화려하게 작곡되었다.
김정희의 작품들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전통음악에 뿌리를 단단하게 두고 있다. 그것은 작곡가 자신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날 우리는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오래된 명제를 갖고 있었지만, 이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작곡가가 많지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전통의 뿌리와 작가의 개성이 행복하게 만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작곡가 김정희는 위의 명제에 가장 분명하고 가장 직접적인 길을 통해 직행하고 있다. 그는 1980년대 민족음악운동이 꿈꾸던 세계를 다시 꿈꾸며, 지난 날 민족음악계가 놓쳤던 방법적인 부분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꿈이 현실이 되어 민족음악 운동이 꿈꾸던 세계를 찾을 수 있기 바라며 작곡가의 말로 글을 맺는다.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고 소통되어 온 민중의 노래이자 분단 이전의 민족의 노래이다. 이북의 민요부터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앞으로 이남의 민요까지 모두 연구하여 우리 민족 고유의 음악어법을 체계화하고, 창작의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민요가 부활하는 것, 그것이 나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2004년 4월 중순경이면 둘째 아이가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소중한 두 명의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 자랐을 때쯤이면, 어디서든 ‘우리민족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분단도 없어지고 모든 종류의 차별도 없어진 그런 세상, 그래서 비로소 참다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남은 인생을 더욱 열심히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